한글 글꼴 100년: 명조에서 산돌·노토까지의 진화사
한글 글꼴 100년: 명조에서 산돌·노토까지의 진화사
by Mimi Artz Editor | Mar 31, 2026 | Category: 타이포그래피
이전 글에서 잔고 폰트가 베팅 판단을 조종하는 방식을 분석하면서, 폰트라는 작은 형태가 인간의 인지에 얼마나 깊게 작용하는지 다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화면에서 만나는 한글 글꼴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오늘 Mimi Artz는 디지털 베팅 인터페이스를 잠시 떠나, 한글 글꼴 100년의 진화사를 시각적으로 따라가 봅니다.
국립한글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한글이 1446년에 반포된 이후 글꼴은 400년 가까이 두드러지는 변화 없이 목판 인쇄용 고어체와 붓글씨 사이를 오갔습니다. 본격적인 글꼴 디자인의 시대가 열린 것은 20세기 초반, 인쇄 기술이 활자로 전환되면서부터입니다. 그 100년의 압축 과정이 오늘 우리가 보는 모든 한글 폰트의 기원입니다.
1. 박경서와 최정호: 1세대 한글 글꼴 디자이너의 등장
1930년대 신문 인쇄에 쓰이던 궁체를 개량해 기하학적인 명조체를 처음 디자인한 인물은 박경서입니다. 그는 세로 짜기를 위한 글꼴의 기준과 원칙을 확립했고, 그가 만든 글꼴은 한국 인쇄 매체와 국정 교과서에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북한과 연변의 글자체에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박경서는 한반도 한글 활자의 공통 조상에 가깝습니다.
그 뒤를 이은 최정호는 한글 디자이너 1세대의 정점에 선 인물입니다.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인쇄소에서 일하며 미술학원에서 디자인을 배운 그는, 평생을 한글 활자 도면 설계와 연구에 바쳤습니다. 최정호의 명조체와 고딕체는 기능적으로 우수하고 조형적으로 완벽한 출판물의 표준이 되었으며,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서도 여러 서체 회사가 그의 글꼴을 바탕으로 디지털 서체를 개발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모니터에서 보는 한글의 절반은 어떤 형태로든 최정호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2. 안상수의 탈네모틀: 한글이 디자인이 된 순간
한글 글꼴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이 1985년에 일어났습니다. 안상수가 안상수체를 발표하면서, 한글이 처음으로 네모틀의 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기존 한글 글꼴은 모든 글자를 같은 크기의 가상 사각형 안에 욱여넣는 방식이었습니다. 안상수체는 그 사각형을 깨고, 자음과 모음의 자연스러운 형태에 맞춰 글자의 폭과 높이를 다르게 설계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형태 변화가 아닙니다. 한글을 읽는 글자에서 보는 글자로 전환시킨 인식 변화의 신호였습니다. 안상수는 한글 서체 디자인과 편집 디자인 분야에 새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의 탈네모틀 실험 이후, 한글은 활자가 아니라 디자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3. 1990년대 디지털 전환: 한글 글꼴 폭발의 시대
1990년대 후반, 데스크톱 컴퓨터에서 윤곽선 폰트(트루타입, 오픈타입)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면서 한글 글꼴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활자가 무형의 디지털 자료로 전환된 것이 이 폭발의 토대였습니다.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이 결합하는 조합형 구조이기 때문에 11,172자라는 방대한 글자를 모두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자모가 정확히 결합하는 한글의 특성상, 디지털 환경에서는 오히려 글꼴 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는 역설이 생겼습니다.
이 시기에 산돌, 윤디자인, 한양정보통신 같은 폰트 회사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폰트 회사가 아니어도 글꼴에 관심 있는 디자이너 개인이 자신만의 한글 글꼴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산돌광수체처럼 디자이너 한 명의 손글씨에서 출발한 글꼴이 상업 폰트로 자리잡는 사례가 등장했고, 이런 흐름이 2000년대 한글 글꼴 다양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4. 무료 글꼴의 시대: 나눔, 본명조, 노토
2010년대 들어 한글 글꼴 시장에 또 한 번의 지각 변동이 있었습니다. 무료 한글 글꼴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네이버가 2010년에 공개한 나눔체 시리즈는 그 시작을 알렸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의 폰트를 사기 위해 수십만 원을 쓰던 시장에, 같은 수준의 품질을 갖춘 폰트가 무료로 풀린 것입니다. 디자이너 개인의 일러스트 작업부터 정부 공공 자료까지 나눔체가 들어가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전자책 시장이 커지면서 KoPub 서체가 등장했고, 어도비와 구글의 협력으로 본명조와 노토 산스 한국어판이 나왔습니다. 노토 산스는 전 세계 모든 문자의 글꼴 통일을 목표로 한 프로젝트였고, 한국어 노토는 그 거대한 프로젝트의 한국 지부였습니다. 기업도 자체 전용 서체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 배달의민족의 한나체, 우아한형제들의 도현체. 폰트가 브랜드 정체성의 핵심 자산이 된 것입니다.
5. 산업이 된 한글 글꼴, 그리고 다음 100년
한글 글꼴은 더 이상 인쇄 활자의 부속이 아닙니다. 디지털 콘텐츠의 핵심 인프라이자, 기업 브랜딩의 자산이며, 디자이너 개인의 표현 도구입니다. 국립한글박물관 한글꼴큰사전 아카이브에는 시대별 한글 글꼴 자료가 시각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디지털한글박물관은 옛 글꼴 입력기까지 제공합니다. 이런 인프라가 가능해진 것은 100년 동안 박경서, 최정호, 안상수 같은 1세대 디자이너들이 닦아 둔 토대 덕분입니다.
Mimi Artz가 어떤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타이포그래피를 평가할 때 첫 번째로 보는 것은 폰트의 화려함이 아닙니다. 그 폰트가 한글의 100년 진화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그 자리가 그 인터페이스의 컨셉과 맞는지를 봅니다. 2026년 H2 비주얼 트렌드 리포트에서 짚었듯, 미니멀리즘이 다시 오는 시대에는 본명조와 노토 같은 절제된 글꼴이 다시 평가받고 있습니다. 화려한 디스플레이 폰트가 줄고, 긴 본문에 적합한 가독성 좋은 폰트가 다시 무대 중앙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100년의 한글 글꼴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가변 폰트(Variable Font), AI 기반 글꼴 생성, 한글 손글씨의 디지털 복원. 가능성은 여러 갈래로 열려 있고, 어떤 방향이 표준이 될지는 디자이너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Mimi Artz는 그 선택의 현장을 계속 관찰할 것입니다.
참고 자료: